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상하이 전투 (문단 편집) === 일본군의 3차 증파와 중국의 총력전 === 10월 20일 일본군 중앙통수부는 교착된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18사단과 24사단의 증파를 결정했으며 화북에서 6사단을 호출하여 이들 3개 사단을 묶어 새로 10군을 편성, 야나가와 헤이스케를 사령관으로 삼아 상하이 파견군을 지원하게 하고 16사단을 백묘강으로 상륙시켜 중국군을 3방향에서 포위 섬멸하려고 했다. 한편 상하이에 파견된 일본군이 10만명으로 늘자 장제스 역시 증원을 결정, 8,9,10,15,19,21 6개 집단군 소속 50여개 사단을 상하이로 증파했다. 화중, 화남의 모든 군대들이 상하이로 기차를 타고 달려왔다. 10월 말에 '''7개 집단군 85개 사단, 70~80만 대군이 집결했다.''' 장제스가 정성껏 가꾸어 온 독일식 정예부대 4개 사단과 중앙군 30만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국군 전체의 4할에 가까운 병력이 투입된 것이다. 하지만 장제스는 이 엄청난 부대들을 무계획적으로 상하이에 투입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름대로 계획적으로 투입하긴 했지만 독일식 교육을 받은 장교들은 시가전 단위의 전투에 능하지 못했다. 애초에 독일군이 시가전에 대해 제대로 배운 것은 한참 뒤인 [[키예프 전투(1941년)]]였다. 시가전이 아닌 평야전 위주로 교리를 갖춘 중국군 입장에서는 좁아터진 상하이에서 계획적으로 싸우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 결과적으로 너무 많은 병사들이 너무 좁은 공간에 몰려서 연락, 보급, 지휘에 애로사항이 꽃피었고 전투 효율이 떨어졌다. 일본군 전함의 함포 사격 한방에 일개 대대가 전멸하는 일도 발생했다. 10월 20일까지 중국군은 13만명의 사상자를 냈다. 공군도 일본군의 항공모함 카가가 도착하면서 밀리기 시작했고 보잘것없었던 해군은 양쯔강 하류에 일본 해군이 진입하는 것만 겨우 저지하고 있었다. 결국 9월 20일 양쯔강 입구의 장인에서 중국 해군은 일본 항공대의 공격으로 사실상 전멸했고 극소수의 함선만이 살아 난징과 우한으로 퇴각했다. 자세한 것은 밑의 [[장인 전투]] 문단 참조. 10월 25일 다창전이 함락되었단 소식에 상하이의 육전대도 반격에 나섰다. 결국 장제스는 주력 부대가 포위섬멸되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10월 26일 전병력에 철수 명령을 하달했다. 10월 26일 심야, 88사단장 손원량은 철수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사진원에게 사행창고를 수비하여 일본군을 유인시켜 공격 속도를 둔화할 것을 명령했다. 27일 오전 11시 사진원은 양서부 휘하의 제1대대 800명을 창고에 집결시켜 방비를 강화했다. 오후 2시에 사행창고의 결사대는 일본군을 유인하여 80명의 피해를 주었다. 이에 분노한 일본군은 사흘 밤낮동안 야포, 전차까지 동원하여 총공격을 가했으나 중국군은 콘크리트 벽들이 무너져내리는 맹렬한 공격에도 밀가루와 콩을 담은 자루를 쌓아올리며 저항했다. 또한 옥상에서 수류탄과 박격포탄을 일일이 손으로 던지며 저항한 결과 일본군 200명을 사살하고 일본군 전차 3대를 파괴하고 4대를 전복시켰다. 10월 28일 새벽에는 걸스카우트 단원인 18세의 양혜민이 총알이 쏟아지는 전장 안으로 난입, 사행창고 옥상에 4미터 짜리 청천백일기를 게양하였다. 이 청천백일기는 28일 시점에서 상하이에 게양된 유일한 청천백일기였다.[* 양혜민은 훗날 타이완으로 이주했고 그녀의 일화는 중화민국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렸다.] 10월 30일, 일본군의 포화가 조계지로 퍼지는 것을 우려한 영국군이 중재에 나서 사진원 부대에게 공동조계로 철수할 것을 제안했다. 중국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10월 31일에서 11월 1일로 넘어가는 새벽, 사진원 부대는 오송강을 건너 공동조계로 철수했는데 이때까지 중국군 전사자는 고작 37명이었고 부상자까지 합쳐도 50명 정도의 피해를 입었을 뿐이었다. 원래 사진원 부대는 내륙의 중화민국 지배지로 철수하도록 약조가 되어 있었으나 일본군의 방해 공작으로 조계측이 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아 사진원 부대는 조계지에 억류되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이 조계지를 점령하였고 이들은 조계지의 중재를 받아 일본군에게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이들에게 강제노역을 부여하여 혹독하게 보복했고 1~200명 정도만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 사령관 사진원은 1942년 4월 24일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사람에게 암살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영웅적인 분투는 중국인들의 사기를 고취하였으며 이들의 일화는 국부천대 이후의 중화민국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다. 훗날 1976년에는 이 사행창고 전투를 배경으로 한 '팔백장사'라는 영화가 대만에서 개봉되었고[* 이 영화에 나온 것이 바로 데뷔 초의 [[임청하]].] 44년 뒤 2020년에 중국에서도 '[[800(영화)|800]]' 이라는 이름으로 사행창고 전투를 다룬 영화가 개봉되었다.[* 여담으로 이미 촬영은 2018년 쯤에 완료했지만 개봉에 상당히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이유는 국민당군이 주축이 된 전투여서 현 인민해방군의 모티브가 되는 홍군의 모습은 아예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밌는건 [[시진핑]] 이전 [[후진타오]] 시기엔 국민당군이 주로 싸운걸 그린 [[난징! 난징!]], [[첩혈고성]], [[진링의 13소녀]] 등 영화들이 대놓고 나왔지만 시진핑 집권 후 [[미중무역전쟁]] 과 [[코로나19]] 등 [[중화인민공화국]]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사건들과 [[홍콩]], [[대만]] 관련 독립문제가 붉어지니 [[중화인민공화국]] 이외의 [[중화민국 국민정부|중국]] 의 헌신적이고 애국적인 모습을 그린 미디어매체는 된서리를 맞을 수 밖에 없다.] 어쨌거나 상하이 북정거장과 자베이를 점령한 일본군은 11월 6일 바쯔차오를 점령함으로 상하이를 거의 손에 넣었고 전 중국군은 상하이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10월 31일 일본군은 쑤저우 강을 도하해 중국군을 쳤지만 수십만의 중국군을 쉽게 이길 순 없었다. 하지만 중국군 역시 예의 지나친 밀집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